11년 전 SBS에서 인기리에 방영했던 드라마 「자이언트」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70년대 초 개발독재부터 90년대 초 민주화 이후 시대까지 현재 부의 상징이 된 강남 개발을 둘러싼 이들의 이권과 야망을 그려낸 대서사시.
필자는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던 수서지구 개발을 둘러싼 갈등을 그렸던 배경의 ‘그’ 수서‧일원동 일대에서 10대, 20대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며 자랐다. 내가 그곳에 살적만 해도 근처에 유흥시설 하나 없는 조용한 동네이자, 푸른 대모산과 수서동 뒤로는 비닐하우스와 논밭이 펼쳐져 있는 시골과도 같은 동네였다. 이곳이 그 유명한 강남이 맞아? 할 정도로 조용한 동네였지만 대중교통을 타고 10여분만 나가면 삼성동 코엑스몰과 대치동 학원가, 부의 상징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만날 수 있는 ‘강남답고 살기 좋은 동네’였던 곳이다.
하지만 동네가 동네인지라,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수서동에 비교적 후미진 곳 오래된 주택가에 사는 학생들과 좋은 아파트에 사는 전형적인 강남 중산층 이상 집안 학생들이 함께 있었고, 내 기억에는 계층 갈등(?)으로 왕따를 시킨다거나 학교폭력을 행사하는 분위기 없이 어우러져 지냈던 것 같다.
몇 년 전 우연히 한 뉴스를 보았다. 내가 살고 자란 수서동 소재 모 아파트의 아이 엄마이자 젊은 주부들이,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조희연 교육감을 상대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유인 즉슨, 내가 살던 당시에는 없었던 수서동, 세곡동 논밭 부지에 공공임대아파트가 대거 들어왔고, 그곳에 사는 학생들을 내가 졸업한 D중학교에 입학시키지 말라는 엄마들의 ‘투쟁’이었다.
나는 그 뉴스를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내가 살던 수서‧일원동에는 여러 계층이 두루 사는 지역이었을지언정, 조용한 동네에서 부모의 소득수준이나 거주형태에 따른 큰 트러블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전형적인 강남의 중산층에서 자란 ‘내 세계관’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 일수도 있다.
여하튼, 그 뉴스는 이미 그 동네를 한참 전에 떠난 나에게는 큰 분노와 충격을 안겨 주었고 대체 ‘강남’이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까지 돈으로 인한 연좌제가 적용되는 시대인가, 더 나아가 이 땅의 자본주의는 대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큰 고통과 고뇌를 안게 되었다.
몇 주 전, 가끔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빼고는 절대 갈 일이 없던 ‘그 동네’에 10여 년 만에 우연히 가게 되었다. 격세지감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대모산과 논밭, 비닐하우스가 즐비했던 그 동네에는, 뉴스에서 보았던 것 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공공임대아파트와 쇼핑몰이 대거 들어와 있었고, 오히려 내가 살았던 ‘그 잘난 강남 중산층 아파트’는 2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초라해 보일 정도로 낡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아파트에 사는 ‘일부 주민들’은, 30여 년 전 강남 개발과 함께 지어진 그 아파트에서 오히려 더 크고 화려하게 올라간 공공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먼 과거의 역사 같았던 자이언트는 여전하다. 강남은 시간이 갈수록 인간으로써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의식 타락과 함께 반비례하여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가끔 친구들과 뛰놀던 그 곳을 쓸쓸한 현실을 뒤로 한 채 추억하곤 한다.
* 심지훈 회원님은 10대 시절을 일원‧수서동에서 보냈으며 지금은 서울시의 한 민간위탁기관에서 무기계약직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