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오후 4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입주해 있는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앞에서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6주기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노동도시연대는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함께 하고 있는데요.
* 관련 기사 : 「26년의 한… “진실화해위는 이덕인 의문사 조사 개시해야”」(2021.11.25 경향신문)
故 이덕인 열사는 1995년 11월, 인천광역시 연수구 아암도 일대에서 구청과 군경, 용역업체의 노점 강제철거에 항의하는 망루농성 중 실종, 바닷가에서 포승줄에 묶인채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을 실시하고 사인을 익사라고 발표했습니다.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의문사’임을 결정하고,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 심의가 결정되었으나 2008년 기각되었습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1기의 조사개시 결정이 있었으나 위원회 해산 이후, 진상조사는 중단되어 왔습니다.
노동도시연대는 이날 추모제에 함께 했습니다. 故 이덕인 열사의 죽음은 강남·서초 지역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1995년 3월 26일, 단속반에 빼앗긴 리어카를 돌려받기 위해 서초구청을 방문했다가 쫓겨난 뒤 분신으로 항거한 장애인노점상 故 최정환 열사 이후, 생계수단이 없는 장애인과 노점상들이 결성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유검우 대표의 추모 발언 전문을 소개합니다.
강남‧서초의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는 100만명에 이릅니다. 그런데 월급을 받고 일하는 임금노동자가 아닌, 또 다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노점상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금도 안내고 장사하는 불법집단’ 운운하지만, 노점은 도시에서 실제하고 있는 노동입니다. 자기 몸 외에 생계를 유지할 방편이 없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생존을 위한 노동입니다. 처음부터 노점상을 꿈꾸며 노점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생업을 위해 대도시로 이주한 이주민들과, 복지와 고용에서 소외된 이들이 노점상으로 내몰려왔음에도, 국가와 지자체는 30여년 이상 노점상에 대한 명확한 제도나 정책을 만들지 않았고, 법적 근거가 불명확한 단속과 양성화를 오가며 들쑥날쑥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른바 ‘기업형 노점’에 대한 일부 비난의 목소리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노점상에 대한 국가 제도와 사무가 없기 때문에 발생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남‧서초는 노점상과 관련된 오랜 탄압의 역사가 있습니다. 서초구는 1990년대 ‘노점 없는 서초거리’를 표방하며 폭압적인 노점 철거로 유명했고, 2010년대 초반까지도 이에 저항하는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26년 전 이덕인 열사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활동했던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는 1995년 3월 서초구청의 폭력적인 노점단속에 항의하다 분신하신 고 최정환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장애인고용촉진법이 만들어졌으나 부양해줄 가족이 없는 장애인들은 사실상 국가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고, 노점상 외에는 생계를 꾸릴 수단이 없었습니다. 최정환 열사는 단속반의 회유와 거짓말, 무자비한 폭력으로 손수레를 빼앗긴 후 물건을 되찾으려다, 모욕적인 언사를 듣게 된 뒤 본인도 존중받아야 할 인간임을 외치며 항거하신 것입니다. 당시 최정환 열사의 죽음 이후 이에 항의하는 시민사회의 저항이 격렬해지자 정권은 열사의 시신을 강남의료원 앞에서 탈취하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강남구도 마찬가지로 전임 신연희 구청장 시절까지 ‘명품 강남’을 내세워 줄기차게 노점상을 탄압했는데요. 당시 시민사회, 정당, 민중운동단체들의 강력한 연대와 투쟁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무조건적 단속과 철거만 반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노점 규격화나 취업 알선 등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생존권 보장을 위한 근본적 대책이 될 순 없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로 서민들의 삶이 더 팍팍해진 현실임에도, 강남구의 경우 오히려 올해 2월 오히려 노점단속을 강화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특히 출퇴근시간, 점심시간과 심야에 붕어빵‧군밤‧김밥‧떡볶이‧샌드위치 등 먹거리, 옷이나 신발 등 생필품을 파는 노점상, 과일 행상 등을 집중 단속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노점상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철거하고 없애야 할 대상인가요?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와 지자체가 살아갈 대책을 마련해줘야 할 우리의 이웃인가요?
올해년도 강남구 건설관리과의 ‘불법노점 및 노상적치물 정비’ 예산은 6억 7천만원에 달합니다. 이웃 서초구의 같은 사업 예산이 4천 4백만 원임을 감안하면 무려 11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6억 7천만 원에서 민간이전, 즉 용역업체에 위탁하는 비용만 5억 9천만 원에 달합니다. 내역을 보면 전부 인건비입니다. 단속반 13명에게 1년간 6억에 가까운 돈을 예산으로 쓰는 것입니다.
강남구는 작년에 노점 단속을 통해 4천 3백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고 합니다. 과태료의 14배가 넘는 금액을 단속 예산으로 짜고, 사실상 용역업체만 배불리고 있는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지자체는 이덕인 열사가 돌아가신지 26년이 흘렀음에도, 가로정비 사업과 예산을 통해 행정의 이름으로 노점상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 민주화보상심의위는 이덕인 열사 의문사에 대해 ‘노점 단속은 지자체의 고유사무이고 적법한 공무집행’이라며 보상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정이 내려진 근거 자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처음부터 국가와 지자체는 노점을 단속하고 없애는 일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명확한 제도를 만들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어야 합니다. 이덕인 열사가 돌아가신 지 26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가 그때보다 더 나아지고, 잘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려면, 최소한 한겨울에 마지막 생계수단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절규하는 노점상들의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용역깡패를 동원해 손수레를 내팽개치는 일이 지자체의 고유사무이고 적법한 공무집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는 십여 년 전 민주화보상심의위의 결정 근거가 오히려 잘못된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하루 빨리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단순히 열사 개인이 국가폭력에 희생되었다는 의혹을 규명한다는 의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먹고살 방편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이웃들이 마지막 생존 수단으로 택하게 되는 노점상. 그 노점상이 법의 이름으로, 행정의 이름으로 짓밟히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덕인 열사 진상규명은 그런 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국가가 인정하고 움직이게 할 첫 단추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노점상들이 탄압받지 않고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날을 위해 지역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관련 기사 : 「이덕인 의문사 조사개시 않는 진화위…유족, 공대위 규탄」(2021.11.25 비마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