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마이너 2021.11.25 보도
“자식 안 귀한 사람이 어딨습니까. 29살밖에 안 먹은 내 새끼가 바다 위에서 갈기갈기 찢겨 발견됐을 때 부모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아들 죽인 나쁜 놈들 벌해 달라고 그놈의 신청서만 수백 장을 냈습니다. 높으신 놈들은 다들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 새끼가 그렇게 죽었어도 그랬을까요. 얼마나 이쁜 자식인지. 내가 사진을 끌어안고 날마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덕인 열사 어머니 김정자 씨)
1995년, 인천시와 연수구의 노점 강제철거에 맞서 저항하다 의문사한 장애인노점상 이덕인 열사. 어머니 김정자 씨는 자식이 왜 죽었는지 밝혀 달라고 20년 넘게 거리에서 투쟁하다 재작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김 씨의 남편 이기주 씨는 올해 3월 10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에 ‘이덕인 의문사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진화위는 8개월이 지나는 동안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 사이, 25일인 오늘 이덕인 열사의 26번째 기일이 돌아왔다.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이덕인열사공대위)는 오후 4시, 서울시 중구 진화위 앞에서 추모제를 열고 진화위가 조사개시 결정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김정자 씨는 아직 회복 중이라 외부 활동이 어렵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추모제에 참석해 진화위를 규탄했다.
진화위 답변 듣지 못한 채 맞이한 이덕인 열사 26주기
이덕인 열사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11월에 의문사했다. 이 열사는 인천시 연수구 아암도에서 노점을 운영하다 인천시와 연수구청의 노점 강제철거에 맞서 싸웠다. 인천시·연수구청이 대동한 천여 명의 경찰과 용역을 피해 망루에 올라 갔다가 나흘 만에 바다 위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 열사는 발견될 당시 상의는 벗겨져 있었고 두 손은 밧줄에 감겨 있었다. 공권력에 의한 타살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찰 1,500여 명이 이 열사가 안치된 길병원 영안실 벽을 뚫고 난입해 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갔다. 강제부검 후 발표된 사인은 익사였다.
이덕인 열사 죽음에 대한 정부 판단은 오락가락했다. 2002년, 대통령 직속기구였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열사가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2008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이 열사가 “노점을 단속한 지방자치단체의 고유 사무”로 인해 사망했을 뿐이라며 명예회복과 배·보상심의 신청을 기각했다.
다음 해인 2009년, 1기 진화위가 이 열사 죽음을 추가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2010년에 1기 진화위가 해산되고 말았다. 1기 진화위 해산 이후 10년 만인 작년 12월, 2기 진화위가 출범하면서 이 열사의 명예가 회복될 길이 다시 열리는 듯했다. 올해 3월 10일, 유족은 이덕인열사공대위와 함께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진화위는 신청서를 받으면 90일 이내에 답변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8개월이 지나는 동안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최예륜 이덕인열사공대위 간사는 “진화위로부터 답변조차 듣지 못한 채 26주기를 맞은 것이 너무 참담하다”고 말했다.
26년 전 투쟁이 아직도… 당시 함께한 동지들 증언 이어져
추모제에서는 경찰이 이덕인 열사의 시신을 탈취할 당시 투쟁했던 박승남 인천사람연대 대표의 증언이 있었다.
“저는 당시 인하대학교에 재학 중인 21살 대학생이었습니다. 총학생회로부터 길병원 장례식장으로 집결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경찰이 이덕인 열사의 시신을 탈취할 수도 있으니 가서 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선배들 말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어떻게 유족의 동의 없이 시신을 탈취할 수 있을까.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은 병원 벽과 창문을 깨부수고 영안실로 들어와 이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갔습니다. 강제로 부검한 뒤 익사라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시신탈취에 맞서 싸우던 많은 선후배가 눈앞에서 연행되고 구속됐습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군부독재 시절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는 걸 믿을 수 없었습니다. 참담했습니다.”
박승남 대표뿐 아니라 26년 전 투쟁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은 “인천시와 연수구의 행정대집행은 완전히 불법이었다. 사전 계고도 하지 않은 데다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노점상들을 끌어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십시일반밥묵차에서 활동하는 유희 씨는 “너무 추운 날, 덕인이가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길병원 영안실에서 6개월을 살며 장례투쟁했다. 인천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덕인이의 영정을 들고 진상규명을 외쳤다. 26년이 지난 오늘, 너무 추운 날에 길거리에 또 나와서 이 죽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게 처참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계속되는 공권력의 ‘노점상 죽이기’… “진실규명해서 노점 죽이는 국가폭력 바꿔내자”
26년 전 이덕인 열사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공권력에 의한 ‘노점상 죽이기’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올해 강남구 건설관리과 ‘불법노점 및 노상적치물 정비’ 예산은 6억 7천만 원이다. 그런데 이중 민간이전, 즉 용역업체 위탁 비용만 5억 9천만 원이다. 내역을 보면 대체로 인건비라 적혀 있다.
유검우 노동도시연대 대표는 국가가 노점상을 불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유 대표는 “노점은 도시에서 실제하고 있는 노동이다. 자기 몸 외에 생계를 유지할 방편이 없는 사람에게는 유일한 생계수단이자 생존을 위한 노동”이라며 “복지와 고용에서 소외된 이들이 노점상으로 내몰려왔음에도 국가와 지자체는 30여 년 이상 노점상에 대한 명확한 제도와 정책을 만들지 않았다. 법적 근거가 불명확한 단속과 양성화를 오가며 들쑥날쑥한 태도를 취했다”고 규탄했다.
유검우 대표는 “강남구는 작년에 노점을 단속해 4천 3백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과태료의 14배가 넘는 금액을 단속 예산으로 짠 것이다. 사실상 용역업체 배만 불리고 있으면서 행정이란 이름으로 노점상을 탄압하고 있다”며 “국가와 지자체는 노점을 단속하고 없애는 일에 골몰할 게 아니라 명확한 제도를 만들고 이들이 살아갈 방법을 제시해야 했다. 용역깡패를 동원해 노점을 부수는 일이 지자체의 ‘고유사무’가 돼서는 안 된다”고 성토했다.
최인기 수석부위원장은 “우리가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실규명을 요청하는 이유는 하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점상 탄압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혀서 노점상을 밀어내는 국가폭력을 바꿔내고자 한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추모제가 진행되는 동안 유족, 이덕인열사공대위, 정근식 진화위원장이 면담했다. 정근식 위원장은 ‘이 사건이 1기 진화위에서 이미 논의된 건이라 특별한 쟁점 없이 조사를 개시하긴 어렵다. 하지만 진화위가 조사 의지가 높다는 것만큼은 믿어 달라’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예륜 간사는 “유족이 ‘언제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하나 뭘 믿어 달라는 건가’라고 항의하자 정 위원장은 이덕인열사공대위와의 공식적 협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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