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 11시, ‘관리소장은 나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책임져야 한다’는 유서를 동료들에게 남기고 목숨을 잃은 아파트 경비노동자 故 박○○ 님을 추모하고 경비원에 대한 갑질 근절, 가해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대치1동 선경아파트 앞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은 노동도시연대도 함께하고 있는 서울지역 아파트경비노동자 조직화사업단, 민주일반노조 서울본부가 주최했습니다. 괴로운 심정을 가슴 속에 담고 세상을 떠났을 고인의 억울함과 고통에 동감하는 경비노동자들의 추모발언과,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법적 업무 이외의 지시, ‘갑질’, 3개월 미만 초단기 근로계약의 문제점에 대한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노동도시연대는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고인은 지난 2013년부터 약 10여 년간 이곳 선경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셨습니다. 동료 경비원 분들이 언론을 통해 전해주신 이야기에 따르면 평소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업무에 철저하고 솔선수범하며 성실한 성품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였는지 고인은 지난 2019년부터 경비반장으로 진급하여 근무하셨습니다.
그런데 2022년 12월경, 새로운 관리사무소장이 부임하였습니다. 동료 경비원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이후부터 아파트 정문차량을 관리하라는 지시가 추가되고, 수목 정리를 지시하는 등 법적으로 경비원 본연의 업무가 아닌 지시가 부쩍 늘어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고성을 지르고, 복명복창을 강요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을 느낄만한 언행이 계속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세차 요원과 청소노동자들이 지하실에서 작업복을 갈아입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령으로 많은 분들이 불편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전까지 선경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은 1년 단위 근로계약을 맺고 있었지만, 경비용역업체가 변경되면서 올해 1월 1일부로 3개월 짜리 초단기 근로계약이 도입되었습니다. 입주자대표회의의 요구로 고용은 그대로 승계되었지만 현재 용역업체는 일부 인원을 감축하겠다는 의사를 경비원들에게 표현해왔다고 합니다. 불리해진 고용계약 조건에서, 경비와 청소 등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점점 열악해지고 지난 2월에는 경비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퇴사를 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3월 8일, 고인은 갑자기 경비반장에서 일반 경비원으로 보직이 변경되었습니다. 신입 경비원의 실수와 장비 오작동 등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3월 14일 오전 7시 16분, 고인은 주변 동료들에게 A4 1장 분량의 글을 사진으로 찍어 전송했습니다. 이 글에는 그동안 함께 근무하며 고생했던 동료 노동자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내용과 함께, 관리사무소장이 그동안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이후 오전 8시경, 고인은 자신이 근무하던 10동 9층에서 투신하신 것입니다…”
이후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남우근 노무사가 해당 아파트단지 경비용역업체의 근로계약서와 업무행태를 통해 드러난 위법한 부분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퇴직금을 근로기준법에 정해진 기간을 넘어 지급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 ▲휴게시간이나 업무 외적인 지시를 받았을 때 본사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자술서를 쓰게한 부분 ▲퇴근 후 30분씩 연장근로를 강요한 부분 ▲경비원끼리 서로를 감시해 인사고과 점수를 주도록 한 부분 등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자회견문을 낭독했습니다.
경비노동자가 살아서 일할 수 있는 아파트를 만들자 – 故 대치동 아파트 경비노동자를 깊이 머리숙여 추모합니다
늘 고가의 부동산이 회자되는 수도 서울 강남 대치동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는 경비노동자가 유명을 달리 하는 안타까운 일이 또 벌어졌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가. 2014년 입주민 갑질에 시달리던 이만수 님이 “경비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산화하셨다. 2020년 최희석 님이 입주민의 폭행에 시달리다 희생되셨다. 그뿐인가. 매년 과로사로 스러져가는 경비노동자가 공식통계로만 70명이 넘는다.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왜곡된 사회 속에서 경비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은 사회적 타살에 다름아니다, 오늘 우리는 무거운 맘으로 돌아가신 대치동 아파트 경비노동자를 애도하며, 경비노동자가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서 일할 수 있는 아파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다.
투명인간으로 취급받아온 지난 세월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서러운 일상을 감내해야 했다. 공동주택인 아파트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해왔지만 감시·단속적 노동자로 지정돼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아왔다. 비좁은 초소 안 화장실 옆에서 쪼그려 앉아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석면이 노출돼 있는 지하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젊은 입주민이 지나가다 술김에 시비를 걸어도, 정해진 시간에 쉬는데 일 안한다고 트집 잡아도 참아야 했다. 심지어 3개월 초단기 근로계약으로 파리목숨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아파트 필수노동인 경비노동자 임금은 변함없이 최저임금이었다. 선진국 그룹인 OECD 가입국인 대한민국에서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국민으로, 노동자로 존중받지 못했다. 이런 사회에서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늘 생명안전의 위협을 받으며 일해왔다.
돌아가신 대치동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고인은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에 3개월짜리 초단기계약을 맺었다. 24시간 격일제 근무에 9.5시간의 무급휴게시간이 있었고 급여는 최저임금이었다. 아파트경비노동자의 정상업무가 아닌 부당한 지시나 휴게시간을 침해받았을 때도 본인이 책임을 지도록 각종 ‘자술서’, ‘동의서’를 강요받았다. 결국 고인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는 호소문을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우선 주무당국인 고용노동부와 서울시가 마땅한 책무를 조속히 시행할 것을 촉구한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 법률 위반행위가 있었는지 면밀히 조사하고, 아파트 관리규약은 적정했는지, 관리체계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부당한 대우에 관한 조치가 이루어졌는지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
더 이상 이같은 비극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가 노동존중사회로 바뀌어야 한다. 정상적인 일터가 되도록 잘못된 법제도와 사회관행을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 우리는 아파트 경비노동자가 살아서 일할 수 있는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다음 요구사항을 촉구한다.
첫째, 3개월 초단기 근로계약을 근절해야 한다. 용역업체가 바뀌어도 고용승계가 보장돼야 한다. 근본적으로 노동인권을 보장받기 어려운 간접고용 구조를 직접고용으로 바꾸고 공공고용구조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과로사가 불가피한 노동환경을 전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전근대적인 24시간 맞교대제 근무체계를 개편하고, 제대로 쉴 수 있는 휴게시설이 보장돼야 한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도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하게 일하고 편하게 쉴 권리가 있다.
셋째, 주휴수당, 연장근로수당, 공휴일, 52시간 근무제가 적용돼야 한다. 정당한 인건비 인상을 이유로 일자리를 잃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도 헌법과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
넷째,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노동자이면서 아파트 공동체 구성원이다. 경비노동자가 무방비로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입주민 갑질은 근절돼야 한다. 생명존중은 입주민과 경비노동자 상생의 근본 전제다.
우리 사회를 위해 일해온 중고령 경비노동자들이 아파트에서 겪고 있는 불합리한 관행과 차별, 고용불안, 갑질 피해를 이대로 둘 수 없다. 죽어야 주목받는 기막힌 현실을 뒤바꿔야 한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이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아파트를 만들 수 있도록 시민들께서도 나서주시길 요청드린다. 오늘 우리는 앞서간 경비노동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단 한 사람의 경비노동자도 차별과 불이익, 인권 침해에 시달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 사회가 보다 나은 상생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갈 것을 다짐한다.
2023년 3월 17일
아파트노동자 서울공동사업단 / 전국민주일반노조 서울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