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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서초 일대에 거주하거나 직장이 있으신 분이라면, 역삼동의 르네상스호텔 사거리라는 곳을 한 번쯤은 지나가 보셨을 겁니다. 사거리 이름의 유래가 된 르네상스호텔은 시대의 풍운아였던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현대건축으로, 김수근은 간암 말기의 상황에서도 병상에서 르네상스호텔을 스케치했다고 전해집니다. 


김수근의 제자인 건축가 승효상에 따르면, 르네상스호텔이 갓 준공된 1988년 중순 무렵에는 역삼역에서부터 삼성동 무역센터까지 이렇다 할 고층 오피스 빌딩조차 없었다고 하니 언덕받이에 위치했던 르네상스호텔은 대단히 돋보였을 것입니다. 1986년 김수근이 타계한 이후, 그의 제자 건축가들은 르네상스호텔과 동일한 외관을 가진 삼부빌딩(1992년 준공, 장세양 설계)과 서울상록회관(1991년 준공, 승효상 설계)을 설계하였고 덕분에 르네상스호텔사거리 일대는 둥근 모서리에 연회색 타일이라는 통일된 경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시가지, 별천지 강남에 유일무이한 맥락을 가진 도시 경관이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관은 채 30년이 못 되어 종언을 고합니다. 르네상스호텔과 삼부빌딩의 소유주였던 삼부토건이 경영난에 빠지게 되면서 두 빌딩은 시중에 매물로 나왔고, 누가 보아도 금싸라기인 곳에 위치했던 두 빌딩은 금세 매각되었습니다. 호텔 산하 피트니스클럽의 회원권을 둘러싸고 잠시 갈등이 발생했으나, 여타 재개발 사업과 비교하면 철거 및 신축 공사는 상대적으로 무탈하게 이뤄졌으며 그렇게 2017년 초, 르네상스호텔과 삼부빌딩은 영원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르네상스호텔과 삼부빌딩의 마지막 모습, 2017년 2월 촬영 ©김영준


하지만 르네상스호텔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서울시가 2011년의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새롭게 수립한 흔적 남기기 가이드라인’(2013년 제정) 덕분에 르네상스호텔과 삼부빌딩의 외관과 이야기가 우리 곁에 남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167,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에서는 르네상스호텔 재개발 과정에서 기존 건축물 구성 요소의 재해석을 계획에 반영하여 기존 건축물 이미지 보전을 시행할 것을 권고합니다. 여태까지 재개발 과정에서의 보존이라고 하면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의 근대건축을 보전하는 것에 그쳤던 것과 달리, 지어진 지 겨우’ 30년 밖에 되지 않았던 엄연한 현대건축이 보전 대상에 포함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르네상스호텔 재개발 사업의 역사적 흔적남기기 사업 심의확정안, 서울특별시 고시 제2016-211호


그 결과, 옛 르네상스호텔과 삼부빌딩 터에 새롭게 준공된 센터필드역삼(20216월 준공) 부지의 곳곳에는 두 빌딩의 기억이 반영구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거리에 면한 공개공지에는 옛 르네상스호텔의 코너부분 외벽이 일부나마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그 옆에는 르네상스호텔과 삼부빌딩의 특징 중 하나였던 특유의 저층부 형상이 금속제 조형물의 형태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나아가 이런 흔적이 어떤 연유에서 남게 된 것인지를 알려주는 흔적 남기기 안내판 또한 설치되어 궁금증을 가진 보행자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금방 눈치채기는 다소 어렵지만 두 채의 거대한 타워로 이뤄진 센터필드역삼의 형상부터, 옛 르네상스호텔과 삼부빌딩을 의도적으로 의식했다고 합니다.

 

▲센터필드역삼의 공개공지에 보존된 르네상스호텔의 외벽 ©김영준

▲조형물로 남은 옛 르네상스호텔의 저층부. 센터필드역삼의 저층부 또한 르네상스호텔의 그것을 일부나마 계승했다. ©김영준


▲보존된 외벽 주변에 설치된 흔적남기기 안내판 ©김영준 


물론 르네상스호텔의 흔적남기기가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센터필드역삼 부지에 보존된 흔적들은 원래부터 르네상스호텔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이들이 아니라면 그래서 이 빌딩이 원래는 어땠는데?’와 같은 의문을 자아낼 여지가 많습니다. 더불어 옛 건축물의 흔적이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서 새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외벽 조각의 형태로 노출된 점 또한 다소 아쉬움을 자아냅니다. 그럼에도, 여타 재개발 사업에서처럼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사라질 뻔 했던 의미 있는 현대건축이 일부나마 보존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망각의 도시 서울, 특히 강남에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계기를 만들어 준 흔적 남기기 가이드라인이지만, 20214월의 재보궐선거를 통해 서울시장이 교체되고 난 이후로, 안타깝게도 존폐의 기로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접하셨을 재건축 아파트 한 동 남기기 사업에 대한 조직적인 철폐 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시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이미 수립했음에도 일부 언론과 업계 관계자들은 근거 없는 흉물 보존으로 흔적 남기기 사업을 폄하하고 있으며, 실제로 보존이 확정되었던 개포주공1단지와 4단지, 잠실주공5단지의 주동은 결정이 뒤집히면서 언제라도 철거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서울시의 흔적남기기 가이드라인은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도시의 발전을 저해할 악마적인 수단으로 몰아갈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2018년 수행된 서울연구원의 도시 흔적 남기기 시민 공감대 형성 방안연구에 따르면, 많은 시민들이 다소 불만은 갖고 있으나 근본적인 흔적 남기기의 취지 자체에는 공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의 흔적 남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논의와 타협을 통해 개선해 나가면 될 일입니다. 부여 받는 인센티브가 적다고, 그저 옛날 것이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우리가 살아온 수 십 년의 세월을 지워버리는 시도를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우리 노동도시연대 회원 분들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시민들께서 더 나은 흔적 남기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반포동에 거주해온 김영준 회원님은 근현대 도시건축·생활유산을 탐방하고 기록하는 인스타그램·페이스북 페이지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를 운영하고 있으며, (재)서울문화재단 발행 월간 <문화+서울>에 격월 연재중입니다. 현재 도쿄대학 도시공학전공 박사과정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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