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자 회 견 문
“오늘날 잘 보존된 자연환경이 국가경쟁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듯, 역사환경은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민족 공유의 재산이자 항구적 가치 창출이 가능한 관광자원인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문화유산을 복원할 의무는 있어도 파괴할 권리는 없다. 후손들로부터 ‘역사를 보존하지 못한 세대’, ‘가진 자원도 쓸 줄 모르는 조상’이라는 지탄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1년 전인 2000년 10월 19일, 국회의원이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 언론사에 기고한 글이다. 우리는 21년이 지난 오늘, 이 문장을 그대로 오세훈 시장과 서울시에 들려주고 싶다. 과거 재임기에는 근현대 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던 동대문운동장과 서울시청사를 기습 철거하더니, 지금은 도시 개발과정에서 지나온 서울시민의 생활모습과 숨결을 남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온 정비사업 역사유산 흔적남기기 정책을 백지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문화재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도시의 발전과 변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은 최근 여러 측면에서 그 가치를 주목받고 있다. 많은 이에게 도시 공간은 생계를 위한 생산 활동이 아니면 이를 보상하기 위한 소비‧유흥 공간과 문화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현재와 맞닿아 있는 가까운 과거의 흔적을 통해 시민들은 자신이 생활하는 그곳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떠올리고, 마음의 안식과 새로운 영감을 얻는 원천으로 삼는다. 또한 지역의 매력요소를 끌어올려 이득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관념과 달리, 문화유산은 그 대상이나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결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나타나기도 하고 희소성의 기준이 변하기도 하며 우연한 계기로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근현대 문화유산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주민들의 난방을 책임지던 오래된 굴뚝이, 실핏줄 같은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십년 장인들의 작업장이, 그 도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치소 감시탑이, 역전 앞 서민들의 애환과 여성들의 아픔이 담겨있는 건물이, 이제는 지어지지 않는 아파트 건물이 증명된 가치가 없어 허물어도 좋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몰역사적인 인식과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치를 증명할 잠시 동안의 틈도 준적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서울시가 개발 논리에 따라 정비사업 역사유산 흔적남기기 정책을 백지화하려는 시도를 강력히 규탄한다. 또한 흔적남기기가 이미 진행 중인 곳에서 사업시행사에 의해 눈 가리고 아웅식 꼼수가 일어나고, 문화유산을 망가뜨리고 있음에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는 서울시의 무책임을 고발한다.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은 대부분 민간이 주도하며 직접적인 혜택을 받는 이들의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서울시가 이러한 정비사업 과정에 흔적남기기를 도입하여 자칫 사라질 수도 있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지키고자 했던 시도는 이전과 비교해 매우 발전된 형태의 문화정책이자, 도시개발 과정에서 공공성을 최대한 담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서울시가 그동안 축적된 성과에 대한 면밀한 평가,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시민 의견수렴 없이 일관성 없는 행정으로 이를 백지화한다면, 향후 도시의 역사성을 보존하자는 취지의 정책과 시민사회의 움직임은 개발논리에 떠밀려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서울시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하나, 서울시는 정비사업 역사유산 흔적남기기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라.
둘, 서울시는 확정된 흔적남기기 대상지와 사업내용에 대한 일방적 백지화를 중단하라.
셋,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와 건축위원회는 무분별한 사업내용 변경 심의를 보류하라.
넷, 서울시는 역사유산 흔적남기기 소위원회 운영을 정례화, 내실화하라.
다섯, 서울시는 정비사업 시 근현대 문화유산 조사와 지정에 대한 구체적 기준, 보존방안에 대한 실질적 조치를 마련하라.
오늘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서울시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우리는 계속 목소리를 내며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과 연대할 것이다.
2021년 10월 22일
서울시 정비사업 역사유산 흔적남기기 백지화 반대, 실질적인 진행 촉구 기자회견 참가자 및 연명단위 일동